❒예수님의 십자가 누구를 위해 지셨는가?(사53:5)
고난주일은 부활주일 못지않게 중요한 절기이다 부활은 고난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역사이기에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기에 부활의 영광도 누리신 역사이다.
우리는 고난주일을 어떤 절기보다도 귀하고 소중하게 지내야 하겠다.
1)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철저하게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역사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라 말씀하고 있다.
죄를 지은 우리가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죄를 지은채로 죽게 되어지면 용서함을 받지 못하고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불못에 들어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죄의 삯이 사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사 하늘의 지혜를 주셨으니 바로 제사다.
히브리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소, 양, 염소에게 자신의 죄를 뒤집어 씌우고, 그 짐승을 잡아 피를 제단에 뿌려 성결함을 받는 역사다.
그런데 그 방법도 완전하지는 못했다. 말1장과 같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소, 양, 염소를 최상의 것으로 드리지 못하고 병든 것, 눈먼 것, 꽁지빠진 것으로 드려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 받는 것조차 외면하시고 싶은 심정으로 제단의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소나 양, 염소를 잡아 드리는 제사가 범패스러운 일이라 생각하시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완전한 제사법을 폐지하시고 완전한 역사를 주셨으니 롬8:3의 말씀이다.
▷롬8:3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예수님이 율법시대에 어린양의 실체로 오신 역사이다.
어린양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에게 우리의 죄를 다 담당시키셨다고 사53:6에서 말씀하고 있다.
▷요1:29에서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죄의 삯으로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어린양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셔서 그 육신 되신 예수님에게 인류가 짖는 모든 죄를 씌우셔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하셨으므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게 된 축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철저하게 우리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셔서 십자가의 피를 흘리신 고난의 역사인 것이다.
사55:5
*우리의 허물 ▶사44:21~22 빽빽한 구름 같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상하심은 ▶우리의 죄악의 인함이다. 가시면류관을 쓰실 때, 못이 박히실 때 상함을 입으셨다.
*예수님의 징계를 받음은 ▶우리가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서 하나님과 교통교제가 두절 되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여러 가지 징계를 사람들로부터 받았지만 그 징계가 바로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평화를 유지시켜주시고 교통 교제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주시기 위하여서 고난의 역사를 징계로 받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은 ▶우리에게 나음을 입게 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은 그 역사가 헛되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의 모든 질병으로부터 나음을 입게 하시고 모든 질고로부터 치료함을 주시기 위함이다.
지금도 그 채찍질의 역사가 유효하여서 우리가 받은 마음의 상처도 치료해주시고, 영적인 병도 육적인 병도 치료해주셔서 어떠한 질병도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므로 우리에게는 깨끗한 치료의 역사를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받으신 모든 고난은 철저하게 우리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로 인한 것이지 예수님으로 인한 고난이 아니었음을 알고 믿어야 하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받으신 고난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받으신 고난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하는 역사가 있어야 하겠다.
2)흰옷입은 무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계7:9~14)
흰옷입은 무리는 계7:1~4같이 하나님의 인맞은 종들이 주의 재림 전 삼년반 동안 다시예언을 외칠 때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하고 구원받아 나오는 역사다. 다시예언은 주의 재림을 알리는 역사임과 동시에 전 세계에 마지막으로 주시는 회개의 역사다.
본문에 어린양의 피는 예수님의 피를 말씀한다.
히9:12~14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양 같은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단번에 드려지므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흰옷입은 무리들을 구원하실 때 다시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흰옷입은 무리들에게도 2천년전에 지신 십자가의 고난의 법이 적용되게 하셔서 그들에게도 흰옷을 입게 하시는 축복이다.
십자가의 피흘리시는 고난은 한 번에 마쳐지지만 그 한 번의 고난은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마지막 환난에서 나오는 흰옷입은 무리들도 십자가의 고난의 진리가 적용이 되어서 그들도 환난으로부터 구원받아 나오는 역사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받은 죄가운데 ▶영혼 구원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서 주신 축복이고
앞으로 장차 환난가운데 받게 될 ▶영육구원의 축복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서만 얻어지는 축복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세대를 초월하여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는 최상의 고난이며 최고로 값진 고난으로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고난의 역사인 것이다.
3)장자의 심정으로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 할때다(계1:9)
예수님께서 공생에 3년 동안 큰 기적을 많이 일으키시며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실 때는 사람들이 인산인애로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 고난 동안에는 아무도 예수님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라하는 베드로도 예수님이 고난 받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었다.
오히려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만보고 있던 베드로에게 게집종이 너도 예수의 당이 아니냐 할 때 두려움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갔던 사도요한에게는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이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고자 두려움을 떨쳐버린 종에게는 어떠한 일도 고난이 닥쳐오지 않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가는 역사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사도요한이 예수님이 십자기 밑에까기 따라가서 예수님의 유언을 받은 것은 말씀을 통해 알수 있다.
요19:34 사도요한은 로마병정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마태나 마가나 누가는 전혀 이 기록을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멀찍이 떨어져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창에 찔리는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으니 그들은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가 로마병정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는 현장을 생생하게 보고 기록할 수 있었던 역사인 것이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아무리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나누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고난은 예수님만이 감당해야하는 십자가의 고난이었고, 예수님이 지시는 십자가는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지셔야할 십가가였기 때문에 사도요한이 예수님을 사랑하였어도 나누어 지지는 못했던 것이다.그러한 사도요한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가시면류관에 머리가 찔려서 피가 철철흐를 때 그 피를 닦아드리지 못했을 때, 예수님의 양손, 양발에 못이 박히는 소리를 다 듣고 있었어도 로마군병의 못질을 제지하지 못하는 사도요한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그래서 사도요한은 밧모섬에 와서 나는 예수의 환난의 고통소리를 직접들은 환난의 동참한 자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사도요한은 예수님이 그 사람하신 제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한 역사이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환난에만 동참한 것이 아니라 밧모라 하는 섬에 귀향을 오므로 밧모섬의 시련연단도 복음으로 인하여 받게 되었노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 사도요한에게는 남들이 받지 못한 영계의 축복을 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최상의 영계축복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미래를 볼수있도록 눈을 열어주신 이 역사가 십자가의 고난에 동창했던 사도요한에게 주신 최상의 영계축복이고, 남들은 듣지 못한 주의 음성을 큰 나팔소리 같이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주신 이 역사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했던 사도요한에게 주신 최상의 영계축복이다.
뿐만 아니라 밧모섬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루신 축복이다.
그 모든 축복의 근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했던 역사요, 밧모섬의 불평없이 견뎌냈던 사도요한만의 축복이었기에 어떤 누구라도 받지 못하는 최상의 축복을 이루신 역사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자신에게 보여주신 될일의 말씀을 기록하고 계22:20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성경 66권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계시록이 마쳐지는 최고의 축복인 것이다.
이제 우리도 장자의 심정을 받아서 복음이 요구하는 뜻이 무엇인지 바로 깨닫고, 그것이 희생이든지, 눈물이든지, 땅의 수고이든지 어떠한 것이라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역사 속에 최상의 영계축복을 받는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결론: 그 나라에도 동참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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