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지자로 부르실 때 주시는 새 역사. (사6:1-8)
이러한 사명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선지자들의 영을 부어주시면서 과거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실 때에 일어났던 새 역사를 주신다. 이런 역사가 내리면 힘이 생기고 열정이 생기고 두려움이 사라지고 자신감이 생기고 영계는 밝아지고 믿음은 견고해지고 말씀은 깨달아지게 된다. 1) 웃시야 왕같은 교만이 죽어지는 새 역사.
이러한 교만한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최고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가장 교만한 왕이 죽던 해에 최고의 선지자 이사야가 부름을 받았던 것같이 우리의 심령 속에 동시에 역사하는 교만은 죽어지고 선지자 같은 역사는 살아나야 한다. 하나님은 아무리 잘났어도 아무리 유능하고 뛰어나도 교만한 사람은 쓰시지 않는다.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꼭 있는 체 하고 아는 체 하고, 신령한 체 하는 것만이 교만이 아니라 가장 큰 교만, 심판받을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교만이요, 예수가 믿어지지 않는 교만이다. 또한 성경의 말씀을 전하는데도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교만이 심판받을 교만이다. 성경에 된 일의 말씀을 전하면 아멘으로 받아들이지만 선지서와 요한계시록 미래의 될 일의 말씀을 전하면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생소하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미련한 사람을 지혜롭게 하실 수 있고, 무능한 사람을 유능하게 하실 수 있기에 그 사람이 부족한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교만한 자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교만한 사람은 은혜를 못 받아도 겸손한 사람은 은혜를 받는다. 사57:15절에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고 겸손한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신다고 하였다. 웃시야 같은 교만한 마음이 우리 속에서 무너져 내려오면 은혜를 받게 되고 우리의 영과 마음이 소성함을 받아 심령이 살아나고 마음이 살아나고 영이 살아나게 된다. 남을 높이고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사람을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겸손은 도덕적인 겸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겸손은 유교적이고 도덕적인 겸손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출 줄 알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복종시킬 수 있는 겸손이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 같아도 그 마음에 교만이 있다면 이는 위선이고 거짓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고 그 말씀 앞에 복종하는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하고 이러한 겸손한 자에게 선지자들의 영을 부어서 이사야 선지자를 쓰시던 것같이 선지자로 쓰신다는 것이다. 엘리 제사장이 사사요 선지자요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고, 높일 수도 있고 낮출 수도 있는 권력을 가졌지만 하나님이 엘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므로 그것이 오래 가지 않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맡겨주시고 일을 시키실 때는 교만을 버릴 때요, 말씀 앞에 낮출 때요, 말씀 앞에 복종할 때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점점 더 높여 쓰시고, 그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그 사람의 환경과 생활을 바꾸어 주신다. 우리에게 있는 교만과 자만, 오만, 거만, 태만이 무너져야 한다. 우리의 환경과 생활이 힘들 때는 낮아지는 것 같아도 다시 그 환경이 좋아지면 교만하여 지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울 때는 낙심할까 조심하고 남보다 좋은 환경이 될 때에는 교만하여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고전10:11-12절에서는 출애굽 때 일을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거울로 경계로 기록해 놓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다. 2) 자신의 부족을 돌아보는 새 역사.
눈과 귀가 열린 이사야 선지자는 제일 먼저 자신의 입술이 부정한 것을 보았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귀를 열어 주시는 것은 다른 사람을 보고 판단하여 정죄하라고 주신 은혜가 아니라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주신 은혜다. 이 시대에 사람을 살리며 설교자로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설 때에 진리를 말하지 못하는 입이라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가장 큰 결격사유가 된다. 선지자 이사야를 부르실 때에 주신 새 역사가 바로 자신의 입이 부정하고 자신의 부족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면 이는 은혜를 바로 받지 못한 사람이다. 남을 보는 눈이 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는 눈이 되어야 하고, 남의 말을 듣는 귀가 되지 말고 자신의 속의 소리를 듣는 귀가 되어야 한다.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우리 속에 있다면 이것이 바로 교만한 왕 웃시야의 마음이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 선지자가 나왔던 것같이 웃시야 같이 교만한 마음이 무너지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시지 않고 자신의 부족을 돌아볼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는 것이다. 시련이 길어지고 고난이 길어지려면 자신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보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3) 죄와 악이 제하여지는 새 역사. ()
이사야에게는 제단의 불로 가장 취약한 입술의 부정함을 성결시켜 주셨고 우리에게는 제단의 성령의 불이 일어나서 우리의 죄를 악을 제하여 주시고 죄를 사하여 주셔서 우리의 부족한 것을 성결시켜 주신다. 하나님이 이사야의 입술을 성결시켜 주시고 선지자로 쓰시기 위하여 이사야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게 했고 탄식하게 하셨다. 우리에게도 뜻이 있으면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고 탄식하게 하셔서 악이 제하여 지고 죄를 사하여 주시는 역사를 주시고 선지자로 쓰신다. 부정한 입술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설교한들 하나님이 역사하여 주시지 않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 이사야는 자신이 그동안 선지자가 되지 못하였던 것이 웃시야 왕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입술이 부정했기 때문인 것을 발견했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였으며 고백하는 순간 불을 받고 입술이 성결받고 죄가 사하여 졌다. 우리가 부정하고 좋지 않은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다. 하나님은 악이 있는 사람, 죄가 있는 사람을 절대로 쓰시지 않기에 우리에게 가장 큰 은혜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뉘우치고 자신의 허물을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살아있는한 하나님은 그 사람을 절대로 버리시지 않는다. 4) 옷을 벗고 발을 벗는 새 역사. (사20:2-3)
옷을 벗는다고 하는 것은 옛사람의 모습을 벗는다고 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면 옛사람의 모습, 옛사람의 습관을 버려야 한다. 이사야는 목자로 일할 때의 냄새나는 옛사람의 모습을 벗고 선지자 이사야로 새 출발을 했다. 슥3:1-5절에는 여호와 앞에 서있는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은 벗기고 새 옷을 입혀주신다고 하였다. 우리는 옛 사람의 모습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어야 하며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았을 때 변화된 새 사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한다. 발을 벗는다고 하는 것은 옛 사람의 생활을 벗는 것을 말한 것인데 과거 모세나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때에 신을 벗었다. 우리는 옛 사람의 생활을 벗고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한다. 아담을 닮은 옛 사람의 모습을 벗고 예수님을 닮은 새 사람의 모습을 입어야 한다. 옛 사람의 생활을 벗고 복음의 신을 신고 새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되지 못하는 것이 교회가 안되는 결정적인 이유이며 자신이 힘들어지는 근본적인 문제다. 사6:8절같이 하나님의 음성이 떨어질 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선지자의 사명을 받게 되는 것이며 이 사람이 외칠 때에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이 격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결론 : 택함 입은 종을 깨어나게 하신다. 자신에게 도취된 삶에서 깨어나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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