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로로만 행하는 종. (사30:20-21)
본문에 늘 뒤에서 말소리가 들리는데 정로로만 가라고 말소리가 들린다고 하였다.
이는 20절같이 숨겨놓았던 종을 하나님이 쓰시기 위하여 21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듣게 하여 정로로만 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의 말소리가 자꾸 들려서 정로로 못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귀로 자꾸 들려져서 정로로 가도록 만드시는 역사가 매일 매일 있어야 한다.
1) 다림줄로 기준잡고 말씀 쫓아가는 종. (슥4:10, 창12:4)
과거에 스룹바벨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수직을 보는 기준으로 다림줄을 들고 다녔고
우리 시대에는 심령의 성전을 이루기 위하여 이 시대에 주신 말씀을 기준으로 잡고 가는 역사를 다림줄이라고 한 것이다.
다림줄같이 기준이 되는 말씀으로 신앙의 기준을 잡고,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의 기준을 잡고, 인간관계까지도 말씀으로 기준을 잡아야 한다.
인간관계에서도 말씀으로 기준을 잡지 못하면 정로를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기준이 흐트러지면 말도 바로 못하게 되고 생활도 바로 못하게 되고 생각도 바로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요셉이 애굽에 살아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 신앙의 기준이 흔들리지 않았고 옥중에 있어도, 총리가 되어도, 풍년이 들어도, 흉년이 들어도 기준이 흔들리지 않았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가서도 신앙의 기준이 흔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기준이 더 견고해지고 확실해졌다.
신앙의 기준을 바로 잡은 사람은 환경이 어려울수록 그 기준을 견고하게 바로 잡았다.
이 시대에 주신 말씀으로 기준을 바로 잡았다면 그 말씀만을 쫓아가야 한다.
창12:4절에 아브라함은 나이가 칠십 오세가 되어도 말씀만을 쫓아가는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말씀을 쫓아갈 때에 자신에게 이익이 생긴다고 하면 바로 쫓아가지만 그 길에 손해나 고난이나 어려움이 있을 것 같으면 그 길을 망설이는데 아브라함은 말씀을 쫓아가는 길에 있어서 손해나 어려움이나 고난을 예상하고도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말씀을 쫓아갔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에 떨었기 때문에 손해나 고난, 어려움이 있어도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말씀에 대한 확신과 말씀 앞에 떠는 신앙이 있다면 말씀을 쫓아가는 길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망설이지 않는다.
다림줄로 기준잡고 말씀을 쫓아가는 종이라야 절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인정이나 사정에 치우치지 않게 된다.
2)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은 종. (계10:7, 계1:1)
비밀에는 천국의 비밀과 그리스도의 비밀, 하나님의 비밀이 있다.
천국의 비밀을 보여주시는 때도 있었고 그리스도의 비밀을 보여주시는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비밀을 보여주시는 때다.
하나님의 비밀을 본인이 연구하고 생각하고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깨닫도록 보여주셔야 하는 것이다.
천국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게 하신 것같이 하나님의 비밀도 깨닫도록 하여 주신다.
렘33:2-3절에는 여호와께 부르짖으면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신다고 하였다.
홍수의 비밀을 깨달은 노아는 다른 사람들이 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갈 때에 그 식구들과 함께 방주를 준비하였으니 이것이 그 시대의 비밀을 못 깨달은 사람과 깨달은 사람의 차이점이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았다면 누가 뭐라고 하던지 신앙의 정로를 가게 되는 것이다.
정로를 이탈해서 자기 길로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단12:9-10절에서 다니엘 선지자는 악한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므로 악을 행하게 된다고 하였고 지혜 있는 자는 봉함한 책의 말을 깨닫는다고 하였다.
계1:1절에서는 봉함한 책의 말씀을 그 종들에게 보이신다고 하였으니 우리는 매일 매일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로로 갈 종에게는 깨달음이 있는 종으로 역사하여 주신다.
깨달음이 있을 때 하게 되는 것이 회개인데 자신이 말로서 자신이 부족함을 시인했다면 그것에 대한 뜨거운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를 범죄케 하여 정로를 이탈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니 이것을 바로 분별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깨달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범죄하지 않는 지혜도 깨달아야 한다.
사단은 우리를 범죄자로 만들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으니 우리는 그 술수에 절대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사단은 끊임없는 미혹과 시험과 역사를 걸어오니 계12장에서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용이 잡아먹으려고 계속해서 역사하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우리가 매일 매일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는다면 절대로 정로를 이탈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남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잘 지켜야 한다.
3) 백마의 사상을 확고히 가진 종. (계6:2, 계19:14-15)
붉은 말 공산주의 사상, 검은 말 자본주의 사상, 청황색말 궤휼주의 사상을 이기는 사상이 백마의 사상이다.
사19:3절에 애굽인의 정신이 쇠약해진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사상적으로 본다면 사상이 흐려진다는 말씀과도 같다.
처음 복음을 받았을 때에 확고한 백마의 사상을 가졌었으나 자신의 환경과 생활로 인하여 그 사상이 흐려지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백마의 사상이 확고하지 못하고 백마의 사상이 흐려지면 복음주의 생각이 아닌 자꾸 다른 생각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흐려진 백마의 사상을 다시 확고히 해야 한다.
사상이 흐려지면 늘 지는 생활을 하고 타협적인 생활을 하게 되고 인정과 사정에 매이게 된다.
그러나 백마의 사상이 확고해지면 늘 이기는 생활을 하게 되어 잘못된 생각이 들어올 때 그것을 이기게 된다.
사상이 흐려졌는지 흐려지지 않았는지는 그 생활을 보면 알 수 있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백마의 사상을 확고히 가지고 고난도 이기고 시험도 이기고 미혹도 이기고 피곤도 이기고 자신도 이기는 생활을 해야 한다.
현재가 아무리 어려워도 백마의 사상으로만이 미래의 축복이 오기에 지금이 바로 정로로 행할 때며 더이상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백마의 사상을 확고히 가지고 매일 매일 이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4) 새 영과 새 마음을 계속 받는 종. (겔36:26)
새 영을 계속받지 않으면 계16:13-14, 계18:1-3절과 같이 귀신의 영을 받게 되기에 반드시 새 영을 받아야 한다.
어떤 영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달라지게 된다.
귀신의 영이 자신에게 역사하도록 두어서도 안되고 귀신의 영이 역사하는 곳에 가서도 안되며 자신에게 계속해서 새 영이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새 마음은 예수의 마음이다.
사19:14-15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사특한 마음을 섞으셔서 매사에 잘못 가게 하신다고 하였으니 사특한 마음이 들어오면 정로로 가지 못하는 것이다.
새 영과 새 마음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사리사욕이 떠나간다.
우리는 새 영과 새 마음을 매일 매일 구하여 새 영과 새 마음을 계속해서 받아야 귀신의 영이나 사특한 마음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5)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여호와를 찾는 종. (사55:6-11)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되 망령되이 불러서는 안되고 여호와의 이름을 전심전력해서 불러야 한다.
여호와가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고 한 것은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욜2:32절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구원해 주신다고 하였다.
사55:6절에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고 하였으니 여호와를 찾으면 늘 그분과의 만남이 있다.
렘29:12-13절에 전심으로 여호와를 찾고 찾으면 만나게 된다고 하였다.
암5:4-6절에 아모스 선지자도 벧엘이나 여리고나 길갈이나 브엘세바나 눈에 보이는 것을 찾지 말고 여호와를 찾으라고 하였다.
습2:3절에 스바냐 선지자는 여호와를 찾으면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결론 : 사49:1-3 숨겨놓고 감추었던 종 정로로만 가게 하신다.